"고객님, 백만원이 입금되셨습니다"

오랜 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를 사용하는 즐거움이 새로왔다. 한국어만의 독특한 느낌을 살리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쏟아낸다는 느낌은 시원하게 배설을 끝낸 그런 뿌듯함이다. 모국어라는 것이 주는 이런 편안함을 참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한국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서 못마땅한 말과 글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나들목"같이 맘에 쏙드는 단어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참으로 못마땅하다.

시도 때도 없이 영어를 뒤범벅하여 쏟아내는 말과 글이 귀와 눈을 거슬리게 한다. 멀쩡한 한국어를 두고 꼭 그리 말하고 써야 하는지 몹시도 불편하다. 한국어를 사용하면 수준이 낮고 영어를 사용하면 수준이 높다는 맹신이 있는 것같다. 하물며 엉터리인 줄도 모르고 "콩글리쉬"를 입에 달고 사는 "영어중독증 환자"임에랴... 아무렇게나 섞어 만든 국적불명 단어나, 제멋대로 늘이고 줄인 표현이나(예컨대, "오나전" "까도남"),  그 자체가 천박한 표현도 젊은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같다.

무엇보다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사물을 존대하는 말법이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못된 것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들을 때마다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은 입에 넣은 것처럼 불쾌하고 역겹다. 처음 들을 때는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멍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니 짜증이 난다.

한국에 와서 얼마 안되어 은행에 갔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은행계정을 확인하고 새로 통장을 만들고 입금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구에서 일을 하던 여직원이 통장과 신분증을 건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객님, 백만원이 입금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어색했는지 나는 "예? 뭐라고요?"라고 되물었다. 백만원이 입금되셨다는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나는 차라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들었다.

"네 놈의 백만원님이 입금되셨다 임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사람은 어디가고 사물이 존대받는 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비단 은행만이 아니었다. 백화점에 가도, 서점에 가도, 시장에 가도 그 못된 말버릇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말버릇에 오염이 되어 있었다.

"그 제품은 비싸세요."
"이것은 할인이 안되시구요..."

참으로 천박한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백만원님"이 입금이 되셨으며, "제품님"이 비싸시며, 할인이 안되신단 말인가. 그런 말법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직장상사가 강요하는가? 왜 멀쩡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 안된단 말인가.

"고객님, 백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그 제품은 비쌉니다."
"이것은 할인이 안됩니다."

한국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관찰하였는데, 도시일수록 이런 표현에 강하게 중독되어 있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같은 이런 몹쓸 표현이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이다. 언어는 바뀌기 마련이라지만 이것은 그런 범주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단어가 아니라 한글을 표현하는 근본 방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못된 말버릇을 들을 때마다 고객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가진 돈과 물건을 왕으로 모시는 것같은 장사치들의 속내를 보는 것같다. 고객을 왕처럼 대우해야 하겠는데 경쟁이 치열하니까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높이려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급한대로 돈과 물건을 높였지만 정작 높여야 할 사람이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과례(過禮)는 예(禮)가 아니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거늘...

좀 과장일는지는 몰라도 이런 표현을 접하면서 한국이 참으로 천박하게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어찌하여 사람은 제쳐두고 돈에만 몰두하는가. 장사치들의 상스러운 짓이 도를 넘은 것이다. 가끔씩은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여전히 나는 그런 표현이 거북하고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좀 멀쩡한 말과 글,  좀 더 품위있는 말과 글을 듣고 보면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싶다. 앞뒤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했으면 한다.

2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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