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의 "가짜 토론"이 궤변이다.

윤평중교수가 쓴 " ‘가짜토론’은 민주주의의 敵이다"라는 글을 우연히 읽고 탄식을 한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궤변을 비판하는 글이 바로 궤변이니 하는 말이다. “토론의 기본 원칙인 정직성과 상호 신뢰성”을 언급하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를 요구했지만 정작 자신의 글에 담은 설명은 정직성과 사실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윤교수는 이번 토론이 “기계적 공정성에 너무 신경을 쓴 탓에 토론의 긴장도가 떨어지고 정책 검증이 부실해졌다는 게 객관적 총평(總評)이므로 토론 방식을 바꾸는 게 적절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선방위가 정한 토론 방식과 민주정치의 큰 원칙을 후보자들이 1차 TV 토론에서 충실히 지켰느냐 하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한 대로 진행된 “토론방식”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말해놓고 그 토론방식과 큰 원칙 (무슨 원칙인지는 모르겠지만)을 지켰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황당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런 궤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토론방식이 적절하지 않다면 고치라고 할 일이고 엉터리 토론방식으로 생고생을 한 토론자들에게는 과도한 책임을 거두는 것이 상식이다. 어쩌면 엉터리 토론방식을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치 않고 토론방식과 원칙은 적절했는데 토론자들이 무시하고 제멋대로 했다면 토론자를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윤교수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정희 발언은 충분히 사실에 근거했다


윤교수는 “정직성과 상호 신뢰성”을 말했고 “사실과 증거”를 강조했다. 내 보기에는 정직면에서 보면 문재인이 제일 나았던 것같고 (참여정부 실정을 겸허하게 인정했으니), 사실과 증거 면에서는 이정희가 제일 나았다. 말하는 태도와 말법을 빼고 이정희가 말한 내용 중에 사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다음 문장에서 찾아보라.

“충성 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군사쿠데타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 좌경용공으로부터 나라 지킨다면서 유신독재 철권 휘둘렀다. …박후보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현금 6억원은 당시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 박후보가 이사장이던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지태씨를 협박해 뜯어낸 장물아닌가. 영남대도 빼앗아서 28살 때 이사장하지 않았나. … 한국정치 고질병, 친일의 뿌리, 독재의 과거, 색깔론 구시대정치 새누리당이 만들었습니다. … 전태일 열사 동상에 헌화하겠다고 노동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는 것은 불통이다. 동생 박지만 회장의 '저축은행 비리연루 의혹' 당시 '동생이 아니라고 하면 아니겠죠'라는 모습은 오만과 독선이다. …골목상권 보호하자고 하면서 새누리당이 골목상권 지키는 법 개정을 막지 않았느냐”

전두환에게 6억을 받은 것이 거짓인가?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고, 군사쿠데타를 했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밀어붙인 것이 거짓인가? 새누리당의 친일, 독재, 색깔론이 사실과 다른가? 도대체 어디가 “사실과 증거”가 부족한 발언인가? 이명박정부에서 매년 날치기를 했고 최근에 제주 해군기지관련 예산도 날치기 한 것이 사실 아닌가?

사실과 증거면에서 가장 빈약한 것은 오히려 박근혜였다. 어떻게 하면 “빨갱이칠”을 해서 상대방을 깎아내릴까 고민을 한 티가 난다. 민주당과 진보당이 서로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를 합의하고 서로 협조했다고 말했지만 그런 소리는 들어본 일이 없다. 두 당에 물어보면 바로 사실여부를 알 수 있는 명백한 거짓말 아닌가? 물론 박근혜는 그것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관심 밖이고 그저 써준대로 열심히 읽은 죄밖에 없지만 말이다. 또 “통진당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하는 것으로…”라고 말했지만 이정희에게 “방송도 됐는데 왜 기억을 못하냐”고 타박을 받았다.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박근혜가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를 사용해 정책 경쟁을 하려고” 했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미국 어디 지역 “찌라시”에서 박근혜가 토론에서 압승을 했다고 사실을 왜곡한 것과 뭐가 다른가?

상호 신뢰성에서도 “낙제점”을 받을 사람은 박근혜다. 그렇게 “네거티브”를 하지 않겠다고 하던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문재인이 압력을 했사했다는 둥 다운계약서를 작성했다는 둥 그랬지 않았는가? 이명박 정권들어서 노무현 측근들을 이잡듯이 조사를 한 것이 사실이고 그런데도 경찰과 검찰이 문제를 삼지 못한 것이 사실인데 더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관련된 내용은 이미 설명이 된 것 아닌가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데도 계속 똑같은 내용으로 상대방을 흠집을 내려 하고 있으니 어찌 “상호 신뢰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박근혜가 이정희에게 국고보조금 운운하며 뭐하러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인격모독을 한 것은 대체 뭐라 해야 할는지. 만일 이정희가 똑같이 박근혜에게 독재자 딸이 자숙할 일이지 뭐하러 대선에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어떻겠는가? 또 누군가가 윤교수에게 “어차피 죽을텐데 당신이 왜 태어나 아직까지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평년작”이고 “안점감”있는 토론인가?

이런 박근혜의 “네거티브”와 이정희의 공격적인 언변에서 피해를 본 것은 문재인이다. 단지 문재인이 남자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여자들이 머리끄댕이 잡고 쌈박질을 하는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들기도 뭐하고 해서 뻘쭘해 있는 사내 문재인을 생각해 보라. (“여자대통령” 어쩌구 하더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들 파워다. 여자 둘이 머리그댕이질로 멀쩡한 남자 하나를 바보로 만들었으니…) 어쨋든 상호 신뢰성을 따진다면 그런 지저분한 “네거티브”를 하지 않고 욕심내서 쌈박질에 끼어들지 않은 문재인이 최고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낙제점은 선거관리위원회다

윤교수는 아마도 이정희가 많이 미웠던 모양이다. 이정희는 “낙제점”에 가깝게 내려깎은 반면 문재인과 박근혜에게는 평년작으로 평했다. 이정희는 “독설과 인격 모독을 통한 감정 건드리기라는 반(反)토론적 기법에 의존”하며 유창한 언변은 화려한 테크닉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또 언변 테크닉은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의도 확대의 오류, 논점 일탈의 오류 등 각종 논리적 오류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대체 어떠한 점에서 그러한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대선후보로 토론회에 나온다면 이른바 전문토론자 혹은 “프로”임을 가정해야 한다. 어차피 상대방을 이기고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켜야 하는 기본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일정한 과장, 비유, 독설 등을 충실히 활용해야 한다. 물론 폭력과 거짓말과 욕설은 허용되지 않는다. “감정건드리기”를 “반(反)토론적”이라고 말했지만 토론에서 필요한 전략이며 기법이다. 사실 감정건드리기는 문재인을 빼고 박근혜와 이정희 모두 사용했다.

박근혜가 국고보조금이 어쩌구하면서 단일화하자고 해놓고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먼저 “도발”을 했고 이정희는 박근혜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당차게 “응사”했다. 적절성 면에서 보면 박근혜의 발언은 100퍼센트 인격모독이다. 대선후보로 나온 사람한테 뭐하러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세상물쩡 모르는 얼간이거나 확실히 상대방을 모독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정희의 대꾸는 다분히 공격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모두가 대선에서 이기려고 나온 것 아닌가? 달리 말하면 상대방을 떨어뜨리기 위해 작정을 하고 나온 것이다. 안그런가? 그럼 박근혜는 문재인을 당선시키기 위해 나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정희는 이 명백한 사실을 좀 공격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더구나 박근혜가 국고보조금까지 언급하면서 작정을 하고 도발을 해왔지 않은가) 그런데도 윤교수는 박근혜의 “독설과 인격모독”을 말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무슨 짓을 해도 다 괜찮다는 소리인가? 그것이 “민주정치의 큰 원칙”인가?

윤교수가 “반토론적 기법”이라느니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의도 확대의 오류, 논점 일탈의 오류”라고 화려한 수사와 현학을 내세웠지만 하품나는 소리일 뿐이다. 똑같은 잣대로 박근혜와 문재인의 발언을 평가해 보기를 권한다. 사회자가 박근혜 발언이 논점에서 벗어난다고 지적한 것을 보지 못했는가? 진보당에서 애국가를 안부른다고 말한 박근혜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는가?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못봤나고 힐난하니까 그제서야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냐며 둘러대는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윤교수는 이런 둘러댐이 유치한 ad-hoc임을 잘 알 것이다.

낙제점을 줘야 한다면 “토론의 긴장도가 떨어지고 정책 검증이 부실해졌다는 게 객관적 총평(總評)”을 받은 토론회(사실 토론회라고 말하는 것이 창피하다)를 마련한 선거관리위원회다. 한쪽에는 두터운 패드를 앞뒤로 끼어주고 다른 쪽은 손발을 묶고 싸우라는 것 아닌가. 이런 엉터리를 “반론과 재반론의 기회를 주고 토론의 긴장을 높여 후보자의 정책과 자질을 판단하는데 획기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룰”로 자화차찬하고 자빠져 있는 위원회가 낙제점이다. “MB표 위원회”의 박근혜 맞춤형 토론아니었던가? (거기에 이정희가 “초”를 쳤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혔을까?)

윤교수는 미국 대선 토론회를 보고 말하라

윤교수는 이정희가 “민주주의와 토론의 최대 공적(公敵)인 이분법적 흑백 논리”를 휘둘러 토론을 망치고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본다. “선동과 궤변이 민주정치를 어지럽힌다는 쓰디쓴 교훈”을 언급하면서 “민주주의의 적(敵)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허위와 궤변이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어느 정치학자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지고지순한” 문장을 읽어본 일이 없다. 어떤 단어를 남을 공격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정의해놓고 낙인을 찍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이분법적 흑백논리 (이 말 자체가 야비하다)는 박근혜와 새누리당에서 애용해온 것인데, 왜 이정희만 문제삼는가? 독재, 부패세력, 친일은 이분법이고 좌파, 종북세력, 빨갱이는 이분법이 아니란 말인가? 유치찬란한 "뗑깡"이 황당할 뿐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같은 선상(차원)에서 놓고 있다는 대목에서 (허위와 궤변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겠지만) 헛웃음에 이어 “이승복 어린이”의 처절한 절규를 떠올릴 뿐이다.

윤교수는 대체 무슨 토론을 원하는가? 박근혜를 괴롭히지 않는 토론인가? 조용하게 서로 비판하지 않고 칭찬만하는 "아름다운" 토론을 원하는가? 갈등과 긴장이 없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추상적인 단어들만 나열되는 "고상하고 우아한" 토론을 원하는가? 그게 윤교수가 원하는 “진짜 토론”인가? 그렇다면 뭐하러 토론을 하는가? 서로 다른 관점을 확인하고 그 정당성을 서로 비판을 통해 따져서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면 뭐하러 텔레비젼에 나오는가? 알맹이없는 인사치레와 "화면발" "화장발" "웃음발"을 내보낼 바에야 뭐하러 먹고살기에도 바쁜 시민들을 두시간이나 붙잡고 있단 말인가? 토론은 집어치우고 쌕시한 브이라인과 "아주 죽여주는" 에스라인을 보여주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윤교수는 얼마전 오바마와 롬니의 토론회를 보지 못했나? 얼마나 긴장이 있고 서로 치열하게 비판하고 설득을 했는지 모르는가? 영국 수상이 야당의원과 서로 마주하고 살벌하게 논쟁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걸핏하면 미국이 어떻고 영국이 어떻고 하는 자들이 이럴 때는 꿀먹은 벙어리인 까닭은 무엇인지… 그런 토론이 민주주의가 원하는 “진짜 토론”이다. 만일 이런 “진짜 토론”이 세 후보에게 열렸다면 어땠을까? 윤교수는 그 결과가 참담할 것(한사람은 회복불능의 치명상을 당했을 것)을 알기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 토론회를 (알았어도) 감히 언급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한 토론방법이 바로 “가짜 토론”의 주범이다. 아무리 못해도 대형사고만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쪽에서 원하는 방식이다. 사실상 토론이 아닌 돌아가며 자기 생각을 말하는 정견발표회일 뿐이다. 앙증맞은 꼬마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율동하는 학예회 수준이다. (청와동 어린이들, 여기서 줄을 서세요. 선생님이 부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요. 짝꿍이랑 말하면 안돼요. 장난치면 나쁜 어린이예요. 무대에 나가면 각자 30초씩만 "이쁜짓"을 하세요? ...) 한마디로 대놓고 토론능력이 빈약한 박근혜를 감싸는 꼼수다. 이정희는 이러한 엉터리 방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진짜 토론”을 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이다.(나는 이정희의 토론법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이정희가 아니라 이런 엉터리를 토론회랍시고 준비한 선거관리위원회라고 생각한다.)

“허위와 궤변”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적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는 이러한 대목에서 흔히 인용되는 명저이다. 포퍼의 “열린 사회”는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는 사회이며 “그 적”은 자유로운 토론을 저주하고 회피하고 더 나아가 훼방을 놓는 세력이다. 서로 의견이 달라 토론을 하자는데 회피하거나 남이 말하지 못하도록 협박하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집단이 열린 사회의 적이다. 우리가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정권을 통해서 지겹게 관찰해온 적들의 행태다. 촛불시위든 뭐든 시민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을 "유언비어"라느니 선동으로 폄하하고,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비판조차 못마땅해 하는 자들이 바로 열린 사회의 적이다. 사실과 진리를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열린 대화”와 자유로운 토론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Benjamin Barber는 그의 저서 Strong Democracy (1984)에서 “[T]here can be no strong democratic legitimacy without ongoing talk.” 라고 적고 있다. 투표하고 다음 선거까지 입닥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끊임없이 토론과정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고 대안을 비교하고, 선출한 "머슴"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들이 하는 짓을 잘 관찰하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못된 짓을 꾸짖어야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열린 사회의 열린 토론은 최소한의 규칙을 제외하고는 토론자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의 규칙은 폭력을 사용해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근거없는 거짓말을 남발하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욕설로 토론을 망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사실을 나열하든, 비유를 하든, 일정한 과장을 하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든, 감성에 호소하든 그것은 토론자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마치 검투장에 나온 검투사처럼 자신이 갈고 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치열하게 싸우고 관객들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과연 지금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한 토론 방법이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하는가? 혀를 찰 일이다.

왜 자유로운 토론이 필요한가? 그것은 누가 정답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제한된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 의견이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절차를 통해 확실하게 틀린 것을 배제해나갈 수 있다. 누군가가 “허위와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사람들의 이성과 상식에 근거한 비판에서 버틸수가 없다. 그 결과 최선은 아니라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고, 최소한 덜 어리석은 엉터리 결정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열린 사회”의 힘이며 이것이 서구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적은 “허위와 궤변”이 아니라 바로 “허위와 궤변”을 용납하지 않은 아집이다. “가짜 토론”이라느니 “진짜 토론”이라느니 하면서 자유로운 토론을 방해하는 세력이 열린 사회의 적이다. “이정희 방지법”을 운운하면서 토론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이 바로 민주주의 적이다. 허위이든 궤변이든 실수든 아니든 넓게 허용하고, 열린 대화를 통해 진위를 가리고 우열을 가리는 것이 민주주의 절차이기 때문이다. 이정희의 말법이 맞든 틀리든 간에 그 평가는 관객(시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일반 시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의견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의견이 반증가능해야 한다. 그것이 틀렸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면 정당한 의견이라고 볼 수 없다. 예컨대, “준비된 후보다” “검찰개혁을 확실하게 해내겠다” 등은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 과학이 아닌 그냥 자신의 생각을 뜬구름잡듯 말할 뿐이다. 토론회에서 후보자들의 정책과 주장이 구체적이어야 하고 검증가능한 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세 후보 모두 이런 반증하기 어려운 추상적 언명에 많이 의존을 했고, 특히 박근혜는 시종일관 뜬구름이었다. “열린 토론”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서로 죽기 살기로 "말로 싸워서" 분명하고 반증가능한 언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서로 논리를 다투어 관객(시민)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번 선거관리위원회의 토론방법은 근본적으로 반증가능한 언명(공약이든 정책이든)을 회피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열린 사회의 敵이라는 소리다.

훌륭한 토론자가 필요하다

이번 “토론회같지 않은 토론회”를 보면서 느낀 것은 토론회를 감상할 국민의 수준은 충분히 높은데, 그 기대를 만족시켜줄 “명품 토론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은 기술은 쓸 만한데 진심이 부족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기술이 서툴지만 진심이 있고, 마지막 한 사람은 기술도 진심도 없으면서 후광에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답답할 뿐이다. 인터넷에 누군가 썼다는 “난 잃을 게 없다” (이정희), “난 읽을 게 없다” (박근혜), “난 낄 데가 없다” (문재인)를 보면서 한국 관객의 높은 수준과 거기에서 한참 모자라는 토론자의 부족함을 쓸쓸하게 생각한다. 치열한 진검승부로 수준높은 관객의 성원에 보답해줄 “토론계의 명품 검투사”를 간절히 기대한다.

2012.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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