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는 정치의 미래다


나가수는 정치의 미래다: “나는 공복이다를 기다리며



나는 가수다라는 노래방송이 연일 화제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와닿는 진한 감동 때문이다. 무슨 복잡한 설명없이도 그저 눈빛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동 때문이다. 가수도 가수지만 연주하는 사람도 노래를 도와주는 사람들도 참으로 열심이기 때문이다. 노래보다는 외모와 의상과 안무에 몰두하는 세태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목마름 때문이다. 눈요기하는 즐거움이 있을지언정 마음을 흔드는 그런 감동을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갈증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랜 가뭄 끝에 장대비를 만난 것처럼 그리노래비에 흠뻑 젖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노래하는 가수가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것이 큰 감동을 주었다. 얼굴과 몸매로 밀고, 화려한 의상과 안무로 이목을 끌고, 말장난으로 현혹하는 사람들이 나왔다면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정해진 대목을 연습한대로 부르고 짜여진 춤을 현란하게 추는 것이라면 목마름을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다. “노래하는 자” (노래를 빙자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가진 역량을 최고로 발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의 모습이 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그런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다.



물론 등수를 매기고 한 사람이 탈락하는 구도는 칼의 양날과 같다. 긴장을 고조시켜 재미를 더하기도 하지만, 지나친 경쟁으로 치닫는다면 가수와 관객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다. 사실 노래로 나름의 일가를 이룬노래쟁이를 평가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부질없는 짓이다. 각자 크기와 색깔이 다르고 곱고 거칠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가수들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어 등수를 매기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가수의 인기도나 그날 가수의 상태와 관객의 선호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등수를 따지는 일은 재미나 흥행을 위한 장치일 뿐이고, 또 그래야만 (등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나는 가수다를 보면서 봄비를 흠뻑 맞는 감동을 느끼면서도 웬지 가슴 한켠이 허전하고 씁쓸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 사회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그동안 보여준 것은 미모와 의상과 안무로 관객을 홀리는 자들의 모습과 같다. 눈요기나 유혹(대운하니 뉴타운이니 하는 미끼용 공약)은 있을지언정 감동을 주는 정치(政治)와 공무(公務)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려고 안달인 자들은 수없이 많아도 정작 대통령의 일을 하려고 원칙을 세우고 스스로를 갈고 닦는 자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씁쓸한 얘기다. 얼마나 가수같은 가수가 드물기에나는 가수다가 방송제목이 되고 사람들에게 얘깃거리가 된단 말인가. 널린 것이 가수를 빙자한 아이들(아이돌)과 춤꾼들이지만 정작 노래를 하는가수 어른음악쟁이를 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아닌가. 마찬가지로 널린 것이 정치와 공무를 빙자한 정치꾼과 고위 공무원들이지만 정작 백성의 머슴노릇을 하려는정치 어른공복(公僕)쟁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말 정치와 공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때 그때 시류 (관객의 입맛)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이다. 그러니 음악에서나는 가수다처럼 정치에도나는 공복이다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같다.


음악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 뿐만 아니라 노래를 만드는 (작사, 작곡, 편곡) 사람과 연주하는 사람과 노래를 들어주는 관객이 필요하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좋은 소리로 연주하고, 좋은 목소리로 불러야 한다. 또 좋은 노래를 좋게 들어주는 관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감동이 있다. 좋지 않은 노래를 만드는 사람도 문제지만 좋은 노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가수 역시 문제다. 정직하지 않고 (립싱크나 기계에 의존하는) 게으른 가수가 노래를 망친다. 하지만 좋은 노래와 좋은 연주와 좋은 가수를 구분하지 못하는 관객이 가장 큰 문제다. 하물며 노래는 뒷전이고 얼굴과 몸매와 옷과 춤에 몰두하는가수 아이들과 그들의 몸짓에 열광하는 철딱서니없는 관객임에랴



정치와 공무도 비슷하다. 좋은 정치를 설계하는 책사와 정치를 이끄는 정치인과 구체화된 정치(정책)를 실행하는 정직하고 유능한 공무원이 있어야 한다. 또한 정책 대상이자 모든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현명한 백성이 있어야 한다. 불량 책사는 허무맹랑한 정책과 마약같은 단기처방을 남발하여 사회를 망친다. 불량 정치인은 원칙과 상식보다는 그때 그때의 이익을 쫓기 때문에 사회구성원의 합의와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좋은 정책을 쥐고 있어도 상황에 따라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여 사회 혼란을 자초한다. 불량 공무원은 공명정대하게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여 낭비와 갈등을 초래한다.



음악에서 관객이 중요하듯이 정치에서 백성이 가장 중요하다. 백성은 스스로 나라의 주인임을 깨닫고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정치인을 보호하고 격려해야 하며, 나쁜 정치인을 타이르고 응징하여야 한다. 자신의 일을 대신 하는 머슴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주인이 되어야 주권자로서 좋은 정치를 누릴 수 있다. 불량 관객은 눈과 귀를 더럽히지만 불량 백성은 자신을 망치고 사회를 망친다. 잘 생기고 춤 잘 추는 춤꾼들만 쫓는 철딱서니없는 관객이 음악을 망치는 것처럼 돈과 권력을 움켜쥔 불량 정치인에게 휘둘리는 어리석은 주권자는 정치를 망치고 자신의 나라를 망친다.



불량 정치인이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뱉어놓은 말을 차분히 듣고 그 시시비비를 따지지 못하는 백성이다. 사실이 어떠한지, 누구의 말이 좀더 합당한지, 누구의 말이 궤변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백성이다. 평화의 댐이니 한반도대운하니 시베아리아횡단철도니 4대강살리기니 뉴타운이니 한강르네상스니 하는 감언이설을 그대로 믿고 표를 몰아주는 귀가 얇은 백성들이다. 매번 불량 정치인과 소위조폭언론에게 속아 좋은 정치인을 내쫓고 핍박한 뒤에 나쁜 정치에 짓눌려 뒤늦게 피눈물을 흘리는 자들이다. 나쁜 공복과 조폭언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정치를 혐오하고, 주권자임에도 투표권을 포기하여 나쁜 정치인을 후원하는 자들이다. 습관에 가까운 그런 무관심이 사실은 못된 공복들을 무서워하는 자신의 비겁함임을 애써 외면하는 자들이다. 유치하게우리가 남이가…” “충청도 핫바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막걸리 받아 마시고 비누받고 찍어주는 천둥벌거숭이들이다.



물론 음악과 정치는 다른 점이 있다. 좋은 가수는 스스로가 만들지만 좋은 공복은 자신 뿐만 아니라 책사와 주권자와 같이 만든다. 관객은 가수를 채찍질하여 노래연습을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주권자는 정치인과 더불어 그들의 시대정신을 가꾸어나간다. 좋은 정치인은 자신의 신념과 포부를 주권자에게 밝히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정치를 만들어 간다. 때로는 어리석은 주권자를 설득하고 양해를 구하지만, 때로는 주권자의 요구(명령)를 뼈아프게 수용한다. 불려진 노래는 가수의 몫이지만 시대정신으로 표상화된 정책은 정치인과 주권자의 몫이고 그들이 함께 만들어간다. 관객은 객석에서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음악을 즐기고 평가하지만 주권자는 공복을 이끌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정치인과 함께정치무대에 같이 서 있다. 객석에 앉아서 남의 일인양 비아냥거리기만 하는 주권자는 그 정치가 자신의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렁이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음악이나 정치나 고통과 시련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배부르고 등따뜻하게 사는 사람은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고,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돈과 권력을 누리면서 살아온 공복은 결코 좋은 정치를 만들 수 없다. 훌륭한 예술가와 역사가 역시 대개 불행한 생을 살았다. 타고난 재능도 재능이지만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신을 만들어간 노력이 예술과 정치 수준을 높인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감동이 있다. 어쩌면 좋은 음악가와 공복을 찾으려면 그들이 살아온 이력을 살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는지 모른다. 부자집에서 공주나 왕자로 성장했는지, 원칙과 상식을 포기하고 거짓말로 눈앞의 이익을 취했는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불이익을 감수했는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기꺼히 내던졌는지를 따져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음악과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관객과 주권자의 무관심과 지나친 참견이다. 텅빈 객석에서 좋은 음악은 무의미하며, 주권자가 외면하는 정치 역시 무의미하다. 관객이 좋은 음악을 분별해주고, 마음으로 들어주고, 박수쳐주고 주머니를 털어 호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체념하는 정치라면, 전체 주권자의 3할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당락을 가리는 정치라면 참담하다. 주권자가 스스로 좋은 공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좋은 공복이 어느날 갑자기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치라면 희망이 없다.



요즘 나는 가수다를 놓고 이런 저런 말이 많다.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수준을 벗어나면 심각해진다. 말많은 자들이 재미삼아 쓸데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다. 남이 잘 되는 꼬라지는 속이 꼴려서 그냥 봐주지 못하는 종족이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게는 무조건 지지를 보내는 반면 다른 가수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유치하고 천박한 일이다. 자신의 귀에 익숙한 노래와 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노래와 다른 음색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 노래와 음색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가수라 해도 인내하고 기다려줘야 한다. 그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살펴주어야 한다. 그의 열정이 전해진다면 마음껏 감동하고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래서 가수들이 자신이 가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스스로도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음악과 음악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가진 신념과 정책을 꼼꼼히 따져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카더라에 휩쓸려 무조건 지지를 보내거나 무조건 저주를 퍼붓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면 그의 눈빛과 손짓까지도 다 좋아보이고, 좋아하는 가수가 아니면 그 가수가 살아숨쉬는 것까지 저주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자신과 상대방의 신념과 정책을 살피지 않는 자들의 편견과 집착 때문이다. 원칙과 이성과 상식에 근거하지 않은 그 어떤 이념도 공허할 뿐이다. 자칭 보수든 진보든 무관심과 지나친 참여는 사회와 나라에 독이 될 뿐이다.



특히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든빨갱이낙인을 찍어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비열한 짓거리를 아직까지도 하고 있음에 참담할 뿐이다. 무슨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싫고 무조건 빨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와 토론이 아닌카더라에 근거하여 빨갱이냐 아니냐만 따질 뿐이다. 그래서 가스통이든 식칼이든 들고 가서 말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이다. 말을 들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판단은 내려진 것이고 하늘이 두쪽나도 그 판단을 번복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분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 이분법에 목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나쁜 공복들이 이런 어리석은 주권자들을 먹이로 삼고 있다. 교주를 떠받들듯이 나쁜 공복들에게 홀린 주권자들은교주의 말을 생각해보거나 토달지 않고 그대로 믿을 뿐이다. 자신이 주권자인 줄을 까맣게 잊고 교주의 노예로 살면서 구복을 구걸을 뿐이다. 주권자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주인은 머슴보다 먼저 일어나야 머슴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법이다. 이런 의미에서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이라는 노무현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 주권을 가진 주인들이 열린 사회에서 스스로 서로 가진 생각을 나누고 비판하고 조정해야 하며,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공복(정치인)을 만들어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를 정확히 반영해줄 정치인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감나무밑에서 홍시가 떨어질 때까지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것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처럼나는 공복이다라는 정책토론방송이 나왔으면 한다. 활짝 열린 토론광장에서 정치인들이 나름의 토론역량을 마음껏 펼쳤으면 한다. 어떤 주제에 따라 자신의 정견을 논리정연하게 밝히고 상대방의 정견을 청여취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반박하는 그런 방송이었으면 좋겠다. 갑옷과 칼을 들고 목숨을 걸과 싸우는 검투사처럼 치열하게 이성과 논리(말장난과 감정싸움과 대비되는)로 우열을 겨루를 그런 박진감나는 토론이었으면 좋겠다. 그 주제와 관련이 있는 주권자들의 생각을 얼마나 이해하여 정책에 반영하는지, 나라 전체 입장에서 얼마나 그 사안을 균형있게 보는지, 주권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정견을 전달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정말 주권자의 눈높이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기고 동감을 이끌어낸다면나는 가수다에서 주는 감동에 못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런 감동을 주는 공복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난 후 주권자의 평가에 근거하여 감동을 주는 정치인과 공무원을 격려하고 함량미달인 정치꾼을 퇴출하는 방송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나는 가수다와는 달리 정책토론으로 감동을 주는 공복을 찾기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어려울 것같다. 따라서 당분간은 감동을 얻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정반대로 주권자에게 참담함을 안기는 자를 가려내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냥 인기투표가 아니라 발언하는 자세, 사실여부, 논리일관성 등을 철저하게 따져 퇴출자를 가려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자, 성의없이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자, 사실과는 다른 얘기를 늘어놓는 자, 남이 써준 글을 읽는다든가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는 자 등은 토론 중이라도 바로 퇴출시켜야 한다.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는 언제나 논란거리이다. 먼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되 주권자의 추천을 받아 심사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심사에서는 토론자의 경력이 아닌 토론능력 (언어능력, 논리력, 분석력 등)을 철저하게 따져야 할 것이다. 또한 도덕성을 따져서 성추행을 했거나 마약이나 사기에 연루되었거나 동족을 학살하는 일에 가담했거나 하는 자들을 가려내야 할 것이다. 특별히나는 가수다에서는 한번 탈락한 것이 그 가수의 실력이 부족했다고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객석의 추천을 반영하여 1년이나 6개월마다 기회를 다시 준다면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폐단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수다는 방송사에서 시작했지만 좋은 관객들이 애정을 가지고 건강한 비판과 격려를 통해 방송을 다듬어 나갔으면 한다. 방송사는 시청률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관객과 소통하여 원칙을 세우고 신뢰를 높여갔으면 한다. “나는 공복이다에서는 지식인들의 역할을 기대한다. 우리 사회도 이성과 상식에 근거한 건강한 토론문화를 가질 때가 되었다. 독재자가 찍어누르고 소외된 주권자는 떼쓰기로 반발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피를 보는 야만사회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성심을 다해 백성을 위해 맡은 일을 수행하고 나서 담담하고 당당하게나는 공복이다라고 말하는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을 봤으면 한다. 그런 공복의 자존심과 자부심을또 하나의 감동으로 볼 수 있기를 목마르게 기다린다.



나는 가수다는 의도했든 안했든 여러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가수들에게는그럼 나는 가수인가?”를 묻는다. 떼도둑처럼 몰려다니는 아이들 가수들게 묻는다. “근데 나 가수 맞아?” 그리고 각자에게 자신의 역할을 묻는다. “나는 제대로 된 학생인가?” “나는 제대로 된 회사원인가?” “나는 얼마나 제대로 된 교사인가?” … 그리고 그 많은 공복들에게 묻는다. “나는 공복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를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관객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주권자다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지를음악을 좋아하고 좋은 가수를 격려해주는 좋은 관객인지, 이성과 상식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고 좋은 공복을 가려내어 지켜주는 좋은 주권자인지를그래서나는 가수다가 좋다.



2011. 5. 26; 30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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